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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검 - 다만 사람으로 서로 어우러지다! (김혜린)

Lucky Clover 2022. 8. 3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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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검: 2004년 12권으로 완결
작가: 김혜린

여린 선에 담긴 강인함 '김혜린'

김혜린은 1962년 9월 4일 생으로 경남 창녕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만화가입니다.
그녀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역경을 견디며 이겨내는 이야기들을 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혁명, 전쟁, 그 안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애환, 힘없는 자들의 전투, 한의 정서 등을 주로 그려내고 있지요. 그림체 또한 이러한 이야기와 너무도 잘 어울립니다. 선이 가늘고 섬세하며 힘이 있습니다. 펜터치라기 보단 붓터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동양적인 정서도 물씬 느껴집니다.
김혜린의 작품들은 주인공들을 개고생 시키는 걸로 유명합니다. 비천무도, 테르미도르도, 불의 검도, 심지어 아라크노아 조차.. 죽을 고생고생을 다 시키고 그렇다고 해피엔딩도 잘 안 줍니다.(꼭 누구 하나 죽음)

1983년 북해의 별이란 대본소용 작품으로 데뷔했습니다. 가상의 왕국 보드니아에서 발생하는 시민혁명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명문자제 유리핀 멤피스를 중심으로 부패한 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사회를 만드는 과정을 담고 있지요. 80년대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데모가 활발했습니다. 그 시기에 이 작품은 가상국가를 통해 이상적인 혁명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로 인해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많은 학생들의 필독서가 됩니다. 데뷔작으로선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죠. 해당 작품은 1987년에 완결됩니다.
데뷔작이기 때문에 작품 초반에는 전형적인 순정만화 그림체를 보여줍니다만, 뒤로 갈수록 김혜린만의 섬세한 그림체를 이뤄갑니다.

1988년 동아시아 무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비천무가 도서출판 프린스에서 발매되며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타루가 설리, 진하, 남궁준광 등 주인공을 중심으로 원나라 말기 전쟁과 사랑, 우정, 그리고 처절한 민초들의 삶을 그려냅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의 그림체는 동양의 스토리와 어울려 마치 동양화 같은 터치를 보여줍니다. 한동안 그림체에 심취했었죠. 아름다운 진하와 설리.. 과거 대본소판, 추후 발매된 애장판 모두 소장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소식이 없네요. 이 작품은 추후 영화, 드라마로도 제작됩니다.(그리고 폭망..) 그와 동시에 최초 순정만화잡지 '르네상스' 창간호에 프랑스혁명을 다룬 테르미도르를 연재합니다. 북해의 별이 혁명의 이상향을 그렸다면, 이 작품은 유제니, 알뤼느 두 주인공을 통해 프랑스혁명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줍니다. 밑바닥에서 자라 혁명의 중심에 다다르는 인물 유제니. 그의 잔인함에 가문이 폭망해서 복수를 꿈꾸는 비운의 여인 알뤼느.. 그러나 알뤼느는 유제니를 통해 시민들의 삶이 얼마나 궁핍한지를 깨달으며 점점 유제니에게 빠져듭니다. 저라도 빠져 듭니다. 정말 말 그대로 나쁘지만 맘은 여린 남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캐릭터. 이 작품 또한 큰 인기를 얻습니다.

1992년에 격주간 순정지 '댕기'에서 불의 검을 연재하게 되었으며, 르네상스에서는 SF 액션물 아라크노아, 화이트에서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광야를 연재하지만 모든 잡지가 폐간되며 이 작품들은 비운을 맞게 됩니다.
2005년이 되어서 불의 검은 12권으로 비로소 완결이 됩니다. 이후 애장판으로 재출시되기도 했습니다.

중간중간 겨울새 깃털 하나, 샤만의 바위, 히스꽃 필 때에는, 우리들의 성모님 등의 단편들도 냈으며 2003년에 김혜린 단편집 - 노래하는 돌로 묶어서 발매되기도 했습니다.


12년간의 불의검 표류기

불의검이 '댕기'에 첫 연재를 알릴 때를 기억합니다. 이 작품 때문에 무려 격주간 순정지라는 댕기를 사 모으기 시작했으니까요. 비천무로 유명한 작가가 대하서사순정극화를 연재한다고 알리니 그당시 순정만화족들에겐 큰 이슈였습니다.
작품은 1992년부터 연재를 시작했고 하자마자 당연히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몇 회 연재하지도 못하고 잡지가 폐간되며 1차 표류기를 겪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순정 잡지 화이트에서 재연재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이 잡지도 폐간되면서 2차 표류기를 겪게 됩니다. 그 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단행본으로 출간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2004년에야 비로소 12권 완결로 마무리됩니다. 무려 12년이 걸렸습니다. 그 후 대원씨아이에서 애장판으로 재출간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둘 다 소장했다가 현재는 애장판만 가지고 있습니다. 아끕..)
2005년에는 뮤지컬로 제작되어 국립극장에서 초연됩니다.

강하지만 여린 남자 아사와 약하지만 강인한 여인 아라의 처절한 사랑

불의검은 청동기-철기시대를 배경으로 카르마키와 아무르 두 부족간의 전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카르마키는 철기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잔인하고 문화적 수준이 떨어지는 부족입니다. 반면에 아무르 부족은 독자적 문자도 갖고 있고 건축기술도 있는 문화적 수준이 뛰어난 선량한 부족이지만 철기 부족인 카르마키에 침략 당해 패배한 후 많은 땅을 잃습니다. 그리고 이를 되찾기 위해 기나긴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여주인공은 강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남자를 구해주고, 기억을 잃은 그에게 산마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본인은 아라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둘은 함께 지내며 정도 들어 둘만의 혼인도 합니다. 어느 날 카르마키 귀족 수하이 패거리(거의 깡패..)가 쳐들어와 아버지는 죽고, 산마로는 포로가 되고, 아라는 잡혀가 수하이의 첩이 됩니다.
이후 카르마키에서 카라에 끌려가 염파 공격을 받는 와중에 기억이 돌아온 산마로는 본인이 아무르의 전사 대장 가라한 아사라는 것을 기억해내지만, 동시에 아라의 존재를 잊게 됩니다. 이후 갇혀있던 곳에서 노예로 부려지던 아무르인들과 함께 탈출합니다.

아라는 수하이로부터 철검을 만드는 법을 전수받습니다. 수하이는 다른 첩들과는 다른 그녀에게 점점 빠저 들고 정부인으로 맞고 싶어 합니다만, 아라는 그에게서 도망쳐 아무르 부족에게 돌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이미 임신 중)
그 와중에 카르마키에서 첩보원으로 활동하다가 발각되어 부상을 입고 도망치던 붉은 꽃 바리를 만나게 되고 그를 도와줍니다. 그리고 평생의 친구가 되죠. 아라와 바리는 아무르 부족에 복귀하지만 카르마키에서 첩이었던 아라는 부족 여자들로부터 멸시와 냉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를 견디며 철검의 비밀을 전수하려 하는 그녀는 진정한 멘털 강자!

한편, 아무르의 전사로 복귀한 가라한은 잃어버린 기억과 아라에 대해 끌리는 마음, 반복되는 전투로 인해 괴로워하며 술에 의지하기에 이릅니다. 아라에게 위안받으려 하지만, 똑부러지는 아라의 거절에 정신이 번쩍들어 가라한 아사로서 그저 그녀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게 됩니다. 그녀 아이의 이름도 지어주며 그녀를 아무르의 부족으로 인정해 줍니다.
그리고 다른 부족 여인과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래 못 감..)

그 와중에 다시 수하이에 의해 납치된 아라. 바리를 통해 듣게 된 '산마로'의 이름. 결국 기억을 되찾은 산마로는 아라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아라는 카르마키의 마녀 카라에게 붙들려 있는데...

이야기의 핵심은 아라와 산마로의 사랑입니다만, 철기시대의 역사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암투, 정치, 대립을 치밀하게 그리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도 놓치지 않으며 섬세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모든 등장인물 모두 개성이 강하고 서사가 있어 하나하나 소중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개고생의 끝판왕들

앞 서 말했듯이, 김혜린의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개고생으로 단련됐습니다. 몇 번씩 죽을 고비를 견뎌야 하고, 항상 전쟁이나 혁명 등 어지러운 시대 속에서 피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꼭 누구하나 죽고 끝납니다.
그나마 불의 검에선 두 주인공은 살려주는 나름의 해피엔딩을 선사해 줍니다.(그러나 꽃같은 바리는...ㅠㅠ)
고생의 정도를 생각하면 아마 작품들 중 단연 최고 아닐까 합니다. 작품 내내 아라 좀 그만 고생시키라며 작가를 원망하는 팬들의 원성도 높았습니다.
배경이 항상 전쟁중이라 삶은 늘 고달픕니다. 도대체 한 곳에서 제대로 산 적이 없는 아라와 산마로. 아라는 피난은 항시대기고 툭하면 납치, 감금 되기도 하고, 포로가 되고, 노예도 되고 첩도 됐다가 죽기 살기로 탈출하고 도망치는게 일상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는 건 디폴트고 어디에 있건 날아드는 냉대와 시기도 견뎌야 합니다. 그 와중에 출산 육아에 대장장이 일까지 해야하지요. 산마로는 어떤가요? 매 등장신마다 목숨을 건 출정이고, 이기고 돌아와도 골치아픈 정치상황에 놓여야 합니다. 철기 비밀을 캐러 카르마키에 침투도 해야합니다. 마녀의 질투까지 얻어 술법공격도 엄청 당합니다. 게다가 둘은 늘 멀리서 그리워만합니다. 서로 고생하느라 잘 못만납니다.

물론 그렇기에 해피엔딩이 좀 더 달게 느껴지긴 합니다. 그래도 워낙 고생해서 애잔함이 좀 깊죠.
그 고생을 해도 강인한 멘탈의 그녀는 여린 몸으로 자기 아이도, 철기의 비밀도 지켜내고 손이 찢어져라 대장장이 일을 하며 결국 철검도 만들어 내는 멋진 여성입니다. 그렇게 냉대하던 부족 사람들도 결국 인정하게 됩니다. 산마로도 기억을 되찾고 표정이 굉장히 유해지죠. 산마로는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무의미한 살상이 자행되는 전쟁은 사실 이 사람의 취향이 아니에요. 사실은 여린 남자. 아라와 사랑하는 게 가장 좋은 로맨티시스트란 말이죠.
그래서 해피엔딩은 앞 선 고생에 대한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모두가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

불의 검에 등장하는 카르마키 수장들은 대부분 악당으로 그려집니다만, 마냥 악당처럼 느껴지진 않습니다. 이게 김혜린의 작품의 특징이기도 한데, 악당에게도 악당이 되어야만 했던 혹은 될 수 밖에 없었던 서사를 부여함으로 독자로 하여감 납득하게 합니다. 그러면 캐릭터가 굉장히 입체적으로 다가오죠.
카르마키의 마녀 카라나 아라를 납치해서 첩으로 삼았던 수하이 같은 경우도 결국엔 보면 어린 시절의 아픔이 악으로 변한 케이스로, 시간이 갈수록 보는 이들에게 그 아픔이 이해가 되고 짠해 집니다. 이건 수하이를 바라보는 아라의 시선의 변화에서도 느껴집니다. 아버지를 죽인 웬수에서 점점 그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면서 불쌍한 한 인간으로 보게 되죠.
결국엔 모두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끝으로 작중 등장하는 '붉은 꽃 바리의 노래'로 마무리합니다.

샤가르바타... 하늘이시여.

이 들판에
다시 꽃들이 만발케 하고

쪽빛 고운 하늘에
새들 다시 날게 하옵시라.

두 발로 걷는 묘한 목숨.

한님의 자손...

사람이로다.

하늘 아래 맨손, 맨발,
사람으로 난 죄뿐이니...

다만 사람으로 서로 장히

어우러지게 하옵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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